2년 전이었던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5.18에 관해, 특히 시민군과 계엄군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많은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물론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관련 사건에 대해 큰 줄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항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확실한 증거만을 바탕으로 사실만을 논할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많은 않다.
증거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확신할 수 없다면 위의 논거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증거에도 깊은 확신을 갖지 않고 의심을 품으며 2중, 3중의 증거에 대한 교차검증을 통하여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해 왔다.
이쯤에서 각설하고...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5.18 당시나 현재의 촛불집회에서의 예비군에 관해서다..
물론 5.18 당시에 관련해서 상당히 많은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크게 2가지 의견으로 나뉘게 되지만, 이 두가지 의견들을 자세히 보면 똑같은 증거를 두고 자신의 의견에 맞게 잘라 맞추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면 자칭 보수나 진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내 놓는 자료들을 잘 훑어보고 비교해 본다면 의외의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증언이나 증거를 두고 얼마나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말이다..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면, 5.18 당시에도 예비군의 역활은 상당히 컷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시민군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미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들로 대학생이거나 노동자들 이었다.(물론 걸인이나 노숙자, 무주민등록자등도 있었지만 이들에 관해서는 차후 다시 설명)
북에서 내려온 대남특수요원이 아니라 이들이 바로 시민군을 조직하고 총기를 조작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위 사진에서 처럼 총기를 다루고 시민군을 조직하는데 예비군의 역활이 상당히 컷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대남특수요원, 즉 간첩이 있었다면, 그들이 일일이 시민군을 조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역활은 후방에서 유언비어 살포나 시민과 계엄군 및 경찰간에 이간질 정도 이다.
솔직히 그들에게는 조직된 시민군 또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시민군 주체가 예비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예비군의 중요한 역활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민사회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점 이다.
그들이 시민군을 조직하고 스스로 무장한 이유또한 무차별한? 계엄군의 진압으로(물론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다. 그들의 의견도 존중하고 서로간의 오해나 감정적인 대립이 있었던 점 또한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시민군이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느껴졌다는 점 이다..)부터 가족이나 사회를 지킨다는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 역설정인 부분일 수도 있다.
정부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투입한 계엄군을, 시민군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무장하고 대항하였다는 부분은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으로부터 물러난 이후, 시민군 내에서도 의견이 양분하게 된다.
스스로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협상하느냐, 끝까지 투쟁 하느냐....
물론 당시 결말은 결사항쟁 및 도청 진압이라는 비극을 낳기는 헀지만, 당시 양분된 의견 중 스스로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협상하자는 온건파의 목소리가 더 두각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광주 이외의 외곽지역인 전남지역 또한 예비군들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군들이 조직되어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 광주 이외의 전남지방은 경찰력이 광주로 집중된 탓에 공권력이 없는 상태였고 그들또한 무장한 이유가 자신들의 가족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사건이 정리된 이후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전남대에서 논문이 나와 있다.
광주에 있었다면, 관련 논문을 직접 찾아서 제시해 주면 좋겠지만, 지금 내 사정이 어느 대학교 기숙사에 처밖혀 있는지라 그러지 못하는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기타 관련자료들도 상당부분 집에 있어서 좀 더 심도있게 쓰지 못한것이 아쉽다.
좀 더 확실하게 쓰면 좋곗지만 지금 서울에서의 상황도 좋지 못한지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급하게 머리속에 있던거 몇자 적어본다.
솔직히 이런 시국에서 잠을 쉬이 이룬다면 그것도 이상할 듯...
현장에서 그들(시민들 뿐만이 아니라 전경들또한)의 진한 땀냄새도 맡지 못하면서 어찌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을까...
이번 촛불집회 에서도 예비군들이 나섯다..
그들은 스스로 스크램블을 짜고 시민들과 전경들 사이의 완충지대 역활을 해 주고 있다.
그들또한,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예비군들의 마음과 다르지는 않을것이다.
아...그리고 한가지..오해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몇자 적는다.
위의 사실을 성급하게 일반화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든 예비군들이 이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시위 현장에 예비군들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촛불 문화재를 예비군들 만이 주도하는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비군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주장, 혹은 가족과 사회의 안정 등 다양한 이유로 참석하고 있고, 시위대들 중에서는 예비군 뿐만이 아니라 학생, 노동자, 농민, 주부등 다양한 계층이 참석하고 있다.
더군다나 누구를 깍아 내리고 누구를 추켜 세울 의도는 전혀 헚으므로 오해하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당시 5.18에 관해, 특히 시민군과 계엄군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많은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물론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관련 사건에 대해 큰 줄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항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확실한 증거만을 바탕으로 사실만을 논할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많은 않다.
증거 자체가 불확실성으로 확신할 수 없다면 위의 논거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증거에도 깊은 확신을 갖지 않고 의심을 품으며 2중, 3중의 증거에 대한 교차검증을 통하여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해 왔다.
이쯤에서 각설하고...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5.18 당시나 현재의 촛불집회에서의 예비군에 관해서다..
물론 5.18 당시에 관련해서 상당히 많은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크게 2가지 의견으로 나뉘게 되지만, 이 두가지 의견들을 자세히 보면 똑같은 증거를 두고 자신의 의견에 맞게 잘라 맞추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면 자칭 보수나 진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내 놓는 자료들을 잘 훑어보고 비교해 본다면 의외의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증언이나 증거를 두고 얼마나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말이다..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면, 5.18 당시에도 예비군의 역활은 상당히 컷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시민군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미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들로 대학생이거나 노동자들 이었다.(물론 걸인이나 노숙자, 무주민등록자등도 있었지만 이들에 관해서는 차후 다시 설명)
북에서 내려온 대남특수요원이 아니라 이들이 바로 시민군을 조직하고 총기를 조작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사진제공 : 5.18 기념재단>
위 사진에서 처럼 총기를 다루고 시민군을 조직하는데 예비군의 역활이 상당히 컷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대남특수요원, 즉 간첩이 있었다면, 그들이 일일이 시민군을 조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역활은 후방에서 유언비어 살포나 시민과 계엄군 및 경찰간에 이간질 정도 이다.
솔직히 그들에게는 조직된 시민군 또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시민군 주체가 예비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예비군의 중요한 역활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민사회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점 이다.
그들이 시민군을 조직하고 스스로 무장한 이유또한 무차별한? 계엄군의 진압으로(물론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다. 그들의 의견도 존중하고 서로간의 오해나 감정적인 대립이 있었던 점 또한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시민군이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느껴졌다는 점 이다..)부터 가족이나 사회를 지킨다는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 역설정인 부분일 수도 있다.
정부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투입한 계엄군을, 시민군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무장하고 대항하였다는 부분은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으로부터 물러난 이후, 시민군 내에서도 의견이 양분하게 된다.
스스로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협상하느냐, 끝까지 투쟁 하느냐....
물론 당시 결말은 결사항쟁 및 도청 진압이라는 비극을 낳기는 헀지만, 당시 양분된 의견 중 스스로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협상하자는 온건파의 목소리가 더 두각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광주 이외의 외곽지역인 전남지역 또한 예비군들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군들이 조직되어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 광주 이외의 전남지방은 경찰력이 광주로 집중된 탓에 공권력이 없는 상태였고 그들또한 무장한 이유가 자신들의 가족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사건이 정리된 이후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전남대에서 논문이 나와 있다.
광주에 있었다면, 관련 논문을 직접 찾아서 제시해 주면 좋겠지만, 지금 내 사정이 어느 대학교 기숙사에 처밖혀 있는지라 그러지 못하는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기타 관련자료들도 상당부분 집에 있어서 좀 더 심도있게 쓰지 못한것이 아쉽다.
좀 더 확실하게 쓰면 좋곗지만 지금 서울에서의 상황도 좋지 못한지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급하게 머리속에 있던거 몇자 적어본다.
솔직히 이런 시국에서 잠을 쉬이 이룬다면 그것도 이상할 듯...
현장에서 그들(시민들 뿐만이 아니라 전경들또한)의 진한 땀냄새도 맡지 못하면서 어찌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을까...
<출처 : 노컷뉴스>
이번 촛불집회 에서도 예비군들이 나섯다..
그들은 스스로 스크램블을 짜고 시민들과 전경들 사이의 완충지대 역활을 해 주고 있다.
그들또한,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예비군들의 마음과 다르지는 않을것이다.
아...그리고 한가지..오해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몇자 적는다.
위의 사실을 성급하게 일반화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든 예비군들이 이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시위 현장에 예비군들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촛불 문화재를 예비군들 만이 주도하는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비군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주장, 혹은 가족과 사회의 안정 등 다양한 이유로 참석하고 있고, 시위대들 중에서는 예비군 뿐만이 아니라 학생, 노동자, 농민, 주부등 다양한 계층이 참석하고 있다.
더군다나 누구를 깍아 내리고 누구를 추켜 세울 의도는 전혀 헚으므로 오해하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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