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그 당시 제 삼자로서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의 회고록을 살펴보아야 할것입니다...
당시 제 삼자로서 한국의 정세에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한 그의 의견을 한번 살펴보아야 할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입장을 살펴보려면 12.12이전에 카터와 박정희정권과의 관계까지 알아보아야 할것입니다..
모든것을 소개하면 좋곘습니다만, 지면상, 시간상의 이유로 간단히 올리겠습니다..
당시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나 위컴 연합사령관등을 비롯한 미국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당시 CIA에 의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는 대등한 수준이라고 하였고, 카터도 이를 빌미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 하지만, 실제 당시의 CIA는 베트남에 정보력이 치중되다보니 한반도 상황에 생각만큼 정보력을 귀 기울이지 않았고, 베트남전 이후 CIA의 보고에 의하면 아직까지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는 좀더 월등하다는 펼가로 다시 철군문제의 반대로 이어집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에 관한 CIA설은 어디까지나 설일뿐, 이를 증명하려면 상당한 증거가 필요할듯 싶습니다..
미국으로선 한반도에서의 안정을 최 우선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박대통령의 암살은 달가워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의 대치상황하에서 미국이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리는 없기 때문 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집권이 무너지면, 사회로서는 큰 혼란을 야기할것이고, 북한의 김일성이 이를 이용할수도 있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더, 카터가 항상 대한정책에서 들고 나온것은 인권문제 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정희 전대통령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살펴보아야 할것입니다...
당시 두사람의 회담은 설전을 오가며 의견일치를 보이지 못했는데,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문제를 들먹이면서 박정희대통령의 심기를 건드고, 또한 어느것도 해줄수 없다는 박정희의 태도에 카터또한 화가 났던것입니다...
당시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동결로 박정희로부터 GDP 6%수준으로 국방비 지출을 높일것과, 인권의 괄목할 만한 신장에 관한 박대통령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당시에는 방위비 문제에 관해서 한국은 이미 개발도상국으로서 과도한 방위비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과거 미국은 한국의 군사력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과 한국 군부의 독재적 경향을 우려해 군사비 증액요구를 의도적으로 자제해 왔다는 점을 볼때, 이는 박대통령에게는 무리한 부탁이었습니다...
물론 카터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박대통령으로서는 카터로부터 북한의 군사력에 비추어 한,미 양국 모두에 중요한 주한미군 철수 동결의사가 있다는 카터의 말을 기대했던것 입니다...
이 회담 이후, 글라이스틴대사와 밴스장관을 박대통령이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받습니다..
이후 청와대 국빈만찬에서 분위기는 좀더 부드러워 졌고, 글라이스틴과 벤스의 방문을 받은 박정희는 방위비 지출을 GDP의 6%이상으로 올릴것을 약속하고, 카터의 인권에 관한 생각을 " 이해한다"면서 가능한 한 조속히 민주화 조치를 취하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카터또한 주한미군 철군 동결에 관해 암묵적인 약속을 하고 계속해서 인권상황 개선조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후, 7우러 5일, 박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보내 앞으로 6개월에 걸쳐 18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곘다는 약속을 해오고 결국 카터도 7월 20일 마침내, 워싱턴에서 철군동결을 발표해 약속을 지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은 정상회담후 악재가 작용합니다..
정상회담후 노동운동가들과 학생, 그리고 반체제인사들과 좌경정치인들은 반정부 노력을 재개하는데, 그들의 시위는 많은 국민들의 호응을 받게 됩니다..
특히나 당시 도시 산업지역에서는 경제사정의 악화에 대한 우려로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고, 한국경제는 국제원유가 상승과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에 대한 과다투자로 높은 물가고와 성장둔화로 어려움을 격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미국의 압력으로 박대통령이 한발 더 양보할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평소 온건하던 정치인들도 반정부 시위에 가세하게 됩니다..
특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국회 내에서 눈에 띄는 강경노선을 펼쳤고, 거기에는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에게 야당지도부 자리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의도 작용하였습니다..
아직 김대중은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있었지만,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도쿄에서의 납치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자신을 준 순교자로 그리면서 막후에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박대통령은 양보대신 강경노선을 선택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10.26사건이 터지고, 박정희라는 큰 중심을 잃어버린 한국은 다시 12.12사태를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2.12당시 주한미대사 글리이스틴의 회고록에 따르면, 10.26사건 이후 12월초 육사 11기와 12기 출신의 젊은 장교집단을 중심으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된다는 보고를 받은 위컴전 한미연합사령관은 노재현국방장관과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들은 단순한 소문으로 일축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212사건 이후 그들이 알아낸 것은, "전두환이 비밀리에 규합한 일단의 장교들이 군 장악을 위해 세심한 준비를 해왔다는 사실과, 그들 숫자는 약 40명으로 육사 11기에서 13기의 경상도 출신이 주류라는 것, 육사에서 4년제 정규교육을 받은 첫 졸업생들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전 당시에는 너무 어렸지만 베트남 참전 경험이 있는 장교도 포함돼 있던 그들은 육사에서 단기교육만 받은 선배장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을뿐 아니라 그들이 고위 중요직책을 독점하고 있는것을 못마땅해 했다." 입니다.
이상이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이야기 하는 12.12사태 입니다..
더 긴 내용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글라이스틴의 회고록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국으로선 당시 카터 전대통령은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았었고, 시기가 카터 전대통령에서 레이건 대통령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전두환측은 양측에 모두 교섭하여 한국정부의 승인을 받고자 하였던것입니다...
레이건 정부는 의외로 카터만큼이나 한국의 인권문제에 깊게 태클을 걸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정부를 미국의 선공한 공작이라고 LA타임즈와 인터뷰에서 말했던 위컴 전한미연합사령관의 발언은 참 언론에 의해서 왜곡된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이는 전두환측도 이용했으며, 운동권측도 이를 이용하여 반미를 주장하는데, 실상은 저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위컴장군의 말 압뒤를 따지지 않았기에 나온 상황인데, 이는 차후에 미국의 역활에서 다시 기술하겠습니다..
전두환측은 자신의 정부가 합법적이다는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국내 방송및 신문등에 악의적으로 왜곡하였다고 글라이스틴은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으로선 한국에 개입할 경우 북한과의 대치상황에 악영향을 끼칠수 있고, 전두환을 대신할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한국의 군사적 안정및 질서유지를 위해 어쩔수 없이 전두환정부를 승인해 주었다고 말히고 있습니다...
뭐 여기에서 이미 지난일이닌 만큼 글라이스틴 자신이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조작하여 말했다면 하는이도 있겠으나, 위 내용들의 요지가 엄연히 당시 12.12사태 이후 글라이스틴이 미 국무부에 보낸 기밀전문(99년 5월에 기밀해제된 문서들 입니다)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기에 조작은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서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였으며, 그 상황에 따라 우연과 필연이 겹치면서 사건이 진행된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이후 전두환의 행적이 결국 대통령으로 이어진 부분은 권력찬탈의 의지를 반영한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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